꽤 오랫동안 블로그는 내게 여러가지 의미로 잊혀져 왔다.
철 지난 유행가,
사 놓고 읽지 않은 새 책,
몸이 불어 입지 못하고 짱 박아 둔 옷과 같은 느낌이랄까.
블로그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마음은 답답해졌다.
그래서, 부러 잊으려고 노력했다.
이 곳의 공간에 뭔가를 남기고 싶어지는 순간
다시, 글을 써야 한다는 부채감에 시달릴테니까.
그럼에도, 다시 블로그 창을 열어 글을 쓰고 있는 것은
남친님의 지난 몇 년간 강추해 마지 않던 책을 읽었기 때문이다.
솔직히 말하면,
글을 못쓰는 욕구에 대한 허기를
글을 읽는 것으로 채워왔다.
닥치는 대로 전자책을 결제해서 말이다.
그것은 그 나름대로 내게 유익한 무언가를 남겼고, 또 그런대로 괜찮은 해결책을 찾았다고 생각했었다.
이 책을 읽기 전까지 말이다.
글을 쓰고 싶다는 욕구를 불러 일으킨 것이 아니라,
조금 더 양질의 도서를 읽어야겠다는 열망을 확인했달까?
판타지라는 장르는 내게 넘을 수 없는 언어의 장벽 같은 영역이었다.
한글로 쓰여 있으나, 한글로 느껴지지 않는 다고 해야 할까?
관심도 없고, 이해하고 싶지도 않은 경제학 서적을 읽는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굳이, 이상한 종족을 들먹이며 소설을 쓰는 것에 대한 거부감도 있었다.
그래서, 몇 년을 시도 했지만, 100페이지를 넘기지 못하고, 이건 나와 맞지 않는다는 결론에 책을 덮어버렸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읽혀졌다.
참, 이상한 일이다.
정말 읽을 수 없을 줄 알았는데, 의외로 쉽게 읽혀졌다.
심지어 너무 재미있었다.
아니, 단순히 재밌다는 말로는 표현이 되지 않을 만큼의 감동을 내게 안겨 주었다.
이토록 이성을 자극하는 글을 너무 오래간만에 만날 수 있었다.
글에 대한 설명은 검색을 하면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기 때문에 굳이 쓰지 않겠지만
작가가 가지고 있는 놀라운 논리적 체계에 대한 찬양은 반드시 해둬야 겠다.
그 긴 글을 읽고,
이렇게 감상문을 쓰는 것도 내 안에서 체계적으로 정리가 되지 않아
어디서 부터 어떻게 써야 할지 망설여 지는데
그 글을 설계하고 풀어낸 작가의 집념과 의지를 어떤 말로 표현 할 수 있을까?
의식의 흐름처럼
내 안에서 꿈틀거리는 이야기를 두서 없이 풀어 놓자면 이렇다.
이 긴글의 시작은 한 인간 남자의 등장으로 시작된다.
한 남자는 자신의 몸보다 몇 배 큰 자루를 질질 끌며 사막을 걸어간다.
그 자루가 지나간 자리에는 그림자처럼 늘어진 핏줄기가 따라간다.
책을 다 읽고나서 그 장면을 다시 떠올리니
참으로 기가 막힌 서두가 아닌가?
그 한 장면으로 그 남자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가까운 미래를 정말 상징적으로 잘 그려냈다.
그 자루에는 나가라는 종족의 시체가 들어있는데, 이 남자는 그 나가라는 종족을 사냥하고, 사냥물을 삶아 먹는다.
삶아 먹는 이유는 그 시체의 재생을 막기 위함이다.
나가는 보통 파충류- 뱀에 가까운- 로 설정되었는데, 도마뱀의 꼬리를 자르면, 다시 그 꼬리가 자라는 것처럼
심장을 적출 한 후에는 재생력이 탁월해져서 죽지 않는다.
그래서 그 남자는 그 종족을 사냥하고, 삶아 먹음으로써 자신만의 의식을 치룬다.
그것은 복수이고, 그 복수는 그 인간의 삶의 목적이 된다.
이유가 어찌되든 어떤 종족의 사냥을 업으로 삼은 그 행위는
누구에게도 이해 받을 수 없고, 납득시 킬 수 없는 고독한 작업이다.
그래서, 남자는 사막을 혼자 걸어간다.
그 긴 핏자국을 남기면서.
그렇게 살아가는 그에게 어느 날 새로운 임무가 부여 된다.
나가를 구출하는 데 길잡이가 되어 달라는 사원의 요청이었다.
남자는 그 요청을 담담히 받아들인다.
여기서, 첫번째 의문.
삶아 먹을 정도로 증오는 종족을 구출해 오라는 사원의 명령을 이 남자는 왜 수락했을까?
수락해야만 할, 어떤 명분이 있나?
이를테면, 목숨을 빚졌다든가 하는, 혹은 사원에 매인 사람이라서 그 명령을 거부 할 수 없다던 가 하는.
그렇다고 해도 순순히 수락한 남자의 태도는 쉽게 이해하기 힘들었다.
그리고, 그가 잠시 머무는 곳에 다른 종족이 찾아 온다.
일명 나가 구출대로 차출된 다른 두 종족.
레콘과 도깨비다.
오래된 전설 - 셋이 하나를 상대한다 - 에 입각해 만들어진 일명 드림팀은 한계선 이남으로 나가를 구출하러 떠나게 된다.
여러가지 사건들을 통해, 어쨋든 나가 종족을 한 일원을 구출하여, 사원에 도착하게 되고
그들의 여정은 끝나는 것처럼 보였다.
그 여정속에서 그 구출대는 여러지방의 왕들을 만난다.
작가는 '제왕병자' 라고 표현하는 데 서로 자신들이 왕이란다.
그 이야기를 다소 우화적으로 보여주는데, 진짜 한심하다.
이런 이런 명분이 있느니 나는 왕이 되기에 충분하다. 그러니 나를 따라라.
왜!!!!!!!!!!
권위는 자리가 만드는 것이 아닌데 말이다.
그런 이야기를 작가는 반복적으로 보여줌으로서,
권력욕에 대한 그리고 그릇된 명분에 대한 생각을 신랄하게 비판한다.
오히려, 왜 꼭 왕이 필요하지? 라고 되묻는 것 같았다.
무정부주의자들처럼.
이 글에 삽입된 유명한 글귀를 하나 써봐야겠다.
놀라운 상징성과 은유를 그냥 지나칠 수야 없지 않은가?
"네 마리의 형제 새가 있소. 네 형제의 식성은 모두 달랐소. 물을 마시
는 새와 피를 마시는 새, 독약을 마시는 새, 그리고 눈물을 마시는 새가
있었소. 그 중 가장 오래 사는 것은 피를 마시는 새요. 가장 빨리 죽는
새는 뭐겠소?"
"독약을 마시는 새!"
고함을 지른 티나한은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쳐다 보자 의기양양한 얼
굴이 되었다. 하지만 케이건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눈물을 마시는 새요."
티나한은 벼슬을 곤두세웠고 륜은 살짝 웃었다. 피라는 말에 진저리를
치던 비형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다른 사람의 눈물을 마시면 죽는 겁니까?"
"그렇소. 피를 마시는 새가 가장 오래 사는 건, 몸밖으로 절대로 흘리
고 싶어하지 않는 귀중한 것을 마시기 때문이지. 반대로 눈물은 몸밖으
로 흘려보내는 거요. 얼마나 몸에 해로우면 몸밖으로 흘려보내겠소? 그
런 해로운 것을 마시면 오래 못 사는 것이 당연하오. 하지만."
"하지만?"
"눈물을 마시는 새가 가장 아름다운 노래를 부른다고 하더군."
.
.
.
"왕은 눈물을 마시는 새요. 가장 화려하고 가장 아름답지만, 가장 빨리
죽소."
.
.
.
"물을 마시는 새는 가장 느리게 날며 독약을 마시는 새는 가장 빠르게 난다
물은 어디든 스며들 수 있다는 점에서 가장 날카롭고 독은 가장 부드럽다
물을 뿌리면 자던 사람도 일어나지만, 독은 사람을 깊은 잠에 빠뜨린다"
-이영도, "눈물을 마시는 새" 중
왕에 대한 작가의 생각을 네가지의 부류로 분류해 놓은 것인데
아마도 '눈물을 마시는 새' 라는 비유가 가장 이상적인 왕의 형상이 아니겠는가, 라고
작가는 독자들에게 되묻는다.
이 내용의 해석은 여러 독자들이 아주 심도 있게 분석해 놓았기 때문에
따로, 덧붙여 설명하지는 않겠지만
'이상'은 그저 '이상' 일 뿐.
이 땅에 그런 지도자가 있을까, 싶었다.
이런 식으로 글을 발췌하자면 하도 명문이 많아
새로은 소설을 쓰는 것과 맞먹는 노동의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에 그만 쓰련다.
구출대 이후의 신을 되찾기 위한 전쟁이야기는 어떻게 써야 할 지 모르겠다.
많은 이야기들이 있고, 또 그 많은 이야기들 속에서 작가는 자신의 생각을 여러 캐릭터를 통해 피력한다.
글의 말미 있는 완전성에 대해 짧게 덧 붙이고 이 감상문을 마무리 해야 겠다.
"자기 완성을 위해 살아간다고 말하는 순간 그 자는 자기 부정에 빠지게 됩니다.
무엇인가를 완성하려면, 그것은 아직 완성되지 못한 것이어야 하니까요.
자기 완성을 위해 살아간다고 말하는 순간 그 자의 인생은
완성되지 못한 것,부족한것, 경멸할 만한 것으로 전락됩니다.
이 멋지고 신성한 생이 원칙적으로 죄를 가진 것이라는 판결을 받게 되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 자는 다른 사람의 인생마저도 그런 식으로 보게 됩니다.
자기 인생을 뭐라고 생각하건 그 작자의 자유 입니다만,
다른 사람의 인생까지 그렇게 보면 문제가 있지요.
.
.
.
우리가 기다리는 완전성은, 물른 저는 그것이 무엇일지 짐작하기도 어렵습니다만,
최소한 불완전성의 반대 개념은 아닙니다.
자기 완성을 위해 살아간다고 말하는 작자들이 말하는 완전성과는 전혀 다른 것일 겁니다.
그런 자들이 말하는 완전성은 고정이고 정체 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기다리는 완전성은 어쩌면 무수한, 끝없는 변화일지도 모릅니다."